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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호박과 자유와 오래된 오해 - 권영상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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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일이지만 30여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하루도 아침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 말은 단 하루도 직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며, 단 하루도 아침 식사라는 오래된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여튼 그 시절 나는 나를 스스로 잘 옭아매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여겼고 잘 순응하는 것이, 그 질서에 잘 길들여지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했다.

직장을 그만두면서부터 나의 아침밥 강행군도 끝났다. 시골에 조그마한 텃밭을 마련하면서 나는 완고한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것은 순전히 호박 때문이다.

땅 한켠에 비스듬한 바위 둔덕이 있었는데 집을 안내해준 분이 말했다.

“여기에 호박덩굴을 올리면 호박 맛을 제대로 보시겠네요.”
나는 그 말에 솔깃해 그 땅을 구했다. 내게는 사람에 대한 좋은 인연이 늘 따른다. 내가 거기 정착하던 이듬해 봄, 그분은 나를 찾아와 호박씨 봉투를 내밀었다.

“한번 심어보세요. 놀라실 테니!”
나는 봄이 오자 호박 심을 구덩이를 깊게 파고 거름을 가득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여섯 개의 구덩이에 호박씨를 심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호박순은 자라 그 바위 둔덕을 뒤덮었다. 볼수록 내가 아는 호박순과 성질이 분명 달랐다.

성장 속도가 빠르고, 직장에 길들여진 나와 달리 자유로웠다. 호박순은 바위 둔덕을 있는 힘껏 쏘다니거나, 인사 한 번 없는 둔덕 너머 집 울타리도 겁내지 않고 올라섰다. 그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다. 치렁치렁 벋은 벚나무 가지를 보면 그걸 잡고 거꾸로 매달리듯 타고 올랐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못할 게 없었다. 그에겐 종교가 없었으니 두려울 게 없었고, 경도된 이념이 없었으니 더욱 두려울 게 없었다. 벚나무 위 푸른 하늘에 박힌 낮달을 잡아보려는 그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그해 늦가을, 여기저기 익은 호박을 보고 우리는 놀랐다.
우리가 생각해 온 둥그렇고 누런 호박이 아니었다. 청회색의 긴 수세미를 닮았다. 호박은 그동안 내면에 둥글다는 오래된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혁명을 품고 있었던 거다. 자유로운 자만이 꿈꿀 수 있는 변신이었다.

호박을 보자, 함께 온 지인의 사내아이가 호박 위에 걸터앉더니 ‘낙타야, 가자!’ 하고 소리쳤다. 호박은 그에게 낙타의 굽은 잔등이 되었다. 그러더니 옆구리에 끼고 띵까띵까 기타 연주를 했다. 금세 호박은 껴안기 좋은 악기가 되었다.

긴 수세미를 닮은 모양의 호박은 처음이었다. 마트에도 없었고, 호박 농원에도 없었다. 첫해 농사치고 꽤 많은 10여 개를 얻었다.

호박씨를 주신 분에게 이게 식용 호박이냐고 물었다. 물론이라고 했다. 자신은 이걸로 지금 아들과 럭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딱 럭비공을 닮았다. 던지고 놀아도 될 만큼 목질처럼 단단했다. 단면을 자르면 속이 샛노랗다 못해 꽃처럼 붉었다.

호박죽을 만들어 먹으면서 알았다. 이게 우리가 아는 동그란 떡 호박과는 전혀 그 형태가 다른 긴 떡 호박이라는 것을.

나는 지인들에게 수세미를 닮거나 럭비공을 닮거나 낙타 등을 닮거나 한 이 호박씨를 보냈다. 호박씨들이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호박에 대한, 아니 인생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오해를 깨뜨려 새롭게 세상에 눈 뜨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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